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비비안 리 (문단 편집) === 얼리비에이와의 결혼생활 === 리는 1931년작의 개작 <애수(Waterloo Bridge)>(1940)에서 상류층 군인 역의 [[로버트 테일러]]와 사랑에 빠지는 [[발레리나]] 역을 맡았다. 진부하지만 효과적인 사건들이 이어진 끝에 리는 [[창녀]]로 전락했다가 전사한 줄로만 알았던 테일러와 재회한다. 리는 영화출연작 중 가장 좋아했다던 이 역할을 시작으로 [[신경쇠약]]을 앓는 인물들을 많이 연기하게 되는데, 리의 연기 속 삶이 실제 병력과 공명하게 된 점이 묘하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f2DsfGVAAEYPni.jpg|width=100%]]}}}|| || {{{#ffffff <애수>(1940) }}} || 1940년 8월 31일 드디어 리와 얼리비에이는 각자의 배우자와 이혼하고 [[로스엔젤레스]] [[산타바바라]]에서 결혼한다. 리와 얼리비에이 둘 다 각자의 자녀 양육권을 얻지 못했지만, 리의 전남편은 리가 사망하기 전까지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신부 들러리는 바로 [[캐서린 헵번]]이었다. 한편 이 해 11월엔 비극이 하나 있었다. 리는 전남편에게 맡겨놓고 거의 찾지 않았던 딸을 간만에 보려고 딸이 있던 [[캐나다]]에 찾아갔는데 "스칼렛"이 왔다며 캐나다 언론이 몰려드는 바람에 일대에 소란이 벌어졌고 딸은 납치 협박까지 받고 말았다. 결국 다른 학생들의 안전에 대한 우려로 딸은 수녀원 직영 학교에서 쫓겨나 강제로 일반 학교 전학을 가야했다. 딸은 그 뒤로도 전남편과 외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결혼 직후 개봉한 <레이디 해밀턴(That Hamilton Woman)>(1941)은 [[엠마 해밀턴]] 전기영화로 얼리비에이가 연인 [[호레이쇼 넬슨]]으로 나왔는데 리는 여기에서도 도덕 기준이 망가진 고급 창부를 연기했다. 이 영화 막바지에서 해밀턴 부인은 넬슨도 전성기의 화려함도 잃은 채 [[알코올 의존증]] 폐인이 되는데, 그 모습을 연기한 리 본인의 말년을 연상케 한다. 이후 리는 "[[안티고네]]"(1949) 등 얼리비에이가 연출하거나 출연하는 연극에 함께 나왔고 영화는 띄엄띄엄 <[[안나 카레니나#s-5.1.2]]>(1948) 등 6편만을 찍었다. 일차적으로는 연극을 영화보다 더 우월하다고 생각한 리의 선호도 때문이었다. 이는 리만 갖고 있던 유별난 사고방식이 아니라 당시 영국 배우들 사이에 깔려있던 지배적인 분위기였으며 오늘날에도 영국엔 이런 기조가 어느 정도 남아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MV5BNzVmYWJkMzUtOGIwNi00YzI1LThlNmUtZjM2NGIxODhiY2ZlXkEyXkFqcGdeQXVyMTgzOTAxMzA@._V1_.jpg|width=100%]]}}}|| || {{{#ffffff <안나 카레니나>(1948) }}} || 그러나 리는 한편으로는 얼리비에이와 함께 영화에 출연하려고 엄청난 노력을 했다. 허나 한쪽이 발탁되면 다른 한쪽은 실패하는 식으로 계속해서 동시 출연이 결렬됐다. 얼리비에이는 히스클리프 역을 맡은 <[[폭풍의 언덕/영화#s-2|폭풍의 언덕]]>(1939)에서 상대역 캐시를 리에게 주려고 노력했으나 제작사에서 끝끝내 거부했다. 리는 이저벨러 역이라도 하길 원했지만, 리가 원하는 수준의 출연료를 줄 수 없다고 해 결국 무산되었다. [[앨프리드 히치콕]]의 <[[레베카(1940)|레베카]]>(1940)에서 겨우 부부 동반으로 주역이 되나 했더니 뽑힌 건 얼리비에이 뿐이었다. 제작자 데이비드 O. 셀즈닉, 히치콕, 그리고 조언을 요청 받은 감독 [[조지 큐코어]]까지도 해당 역할에 리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셀즈닉은 또한 둘의 스캔들 때문에 이혼이 완료될 때까지는 둘이 함께 작업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리를 제치고 선택된 [[조운 폰테인]]에게 얼리비에이는 매우 차갑게 대했고, 거기다 "촬영 스태프가 죄다 영국인들인지라 미국인인 나를 왕따시켰다"고 폰테인이 후에 털어놓았다. 또한 셀즈닉에게 분노한 리와 얼리비에이는 두 번 다시는 셀즈닉이 제작하는 영화에 출연하지 않았다. 게다가 "[[로미오와 줄리엣]]"(1940) 공연 때처럼 무대 연기를 망치기도 하면서 [[양극성장애]]가 심해졌다. 얼리비에이 때문에 리가 연기를 망쳤다는 평이나 얼리비에이가 리 때문에 연기를 망쳤다는 소리가 번갈아 나왔다. 완벽주의자였던 리는 나쁜 평에만 집착하는 습관이 있어 얼리비에이의 위로조차도 거부했다. 때로는 실제 이상의 혹평이 쏟아지기도 해서 얼리비에이는 "(평론가들은) 리의 미모 때문에 판단을 그르쳐 계속해서 리의 연기를 합당하게 대우해주지 않는 행위를 중단해야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둘은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에 거액을 투자했었는데 연기평 뿐만이 아니라 흥행에서도 참패해 큰 손해를 보았다. 설상가상으로 리는 평소 건강 상태가 안 좋았던 탓에 부부의 2세를 계속 [[유산(의학)|유산]]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양극성장애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어 결국 발작 증세까지 일으킨다. 특히 [[클로드 레인스]]의 상대역으로 나온 영화 <[[클레오파트라 7세/기타 창작물#s-1|시저와 클레오파트라]]>(1945) 촬영 중에 넘어지면서 아이를 유산했을 때 크게 낙심했다. 게다가 이 영화는 흥행에도 불구하고 적자를 봤다. 리는 한 번 발작을 시작하면 갖은 욕설을 내지르고 물건을 던지며 이를 말리는 얼리비에이를 폭행하는 등 과격한 행동을 하다가 마지막에는 바닥에 쓰러져 울다 기절했다. 깨어난 뒤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했고, 나중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된 후엔 매우 부끄러워 했다. 이런 증세가 심해지면서 리는 대부분의 연극 순회공연에서 중도 하차/복귀를 반복했다. 얼리비에이가 그 무엇보다도 참을 수 없었던 건 리가 다른 사람들 앞에선 최대한 멀쩡한 척 잘 참다가 "가장 그래선 안 되는 대상인" 자신 앞에서만 "그 악마"를 풀어놓는다는 점이었다. 1944년엔 [[북아프리카]]에 주둔 중이던 군 위문을 위해 순회공연을 다녔다. 직후 몇 주 동안 고열과 기침에 시달리다가 왼쪽 폐가 [[폐결핵]]에 걸려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리는 하루에 [[담배]]를 4갑 이상 피울 정도로 지독한 [[골초]]였다. 1947년 얼리비에이가 기사 작위를 서훈한 뒤 레이디 얼리비에이(Lady Olivier)가 되었고, 이혼한 후에도 영국 특유의 관습에 따라 최소한 영국 내에선 계속 그렇게 불렸다. 이때부터 귀족들과의 사교 생활이 시작돼 다양한 교류가 있었다. 1940년대 후반 리와 얼리비에이는 올드 빅의 재건을 위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손튼 와일더[* Thornton Wilder. 1897 - 1975.] 희곡 원작의 "위기일발"(1945)[* The Skin of Our Teeth. 20세기 초 [[뉴저지]]. [[캐나다]]에서 얼음벽이 남하하면서 [[빙하기]]가 닥쳐 미 북동부 인류가 절멸위기에 빠진다. 노골적인 [[성경]] 은유를 통해 인류와 문명의 가치를 되묻는다.] 등 순회공연을 많이 다녔는데 1948년의 [[호주]] 순회공연 6개월 동안 리는 [[불면증]]으로도 고생하였고 종종 연기를 대역에게 넘기기도 했으며, [[부부싸움]]도 잦았다. [[크라이스트처치]] 공연에서 한 번은 리가 신발을 못 찾겠다는 이유로 무대에 오르길 거부하자 얼리비에이가 리의 뺨을 때리기까지 했다. 리도 똑같이 얼리비에이의 뺨을 때려 응수했다. 얼리비에이는 훗날 "호주에서 비비언을 잃어버렸다"고 회고했다. 정확하겐 리가 이때 얼리비에이를 잃어버린 것이다.--[[레트 버틀러]]와 [[스칼렛 오하라]]의 현실판--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vivien-leigh-3.jpg|width=100%]]}}}|| 이즈음 리는 "얼리비에이를 아직 사랑하긴 하지만 이젠 거의 남매 같다"고 말하고 다녔다. 얼리비에이의 자서전 "어느 배우의 고백[* Confessions of an Actor.]"에 따르면 리는 이 말을 얼리비에이 본인에게도 했다고 한다. 결국 리는 호주인 배우 [[피터 핀치]]와 바람을 피우기까지 한다. 얼리비에이는 [[호주]]에서 핀치의 재능을 발견하고 자신의 극단에 들어와 영국에서 일할 것을 권했고, 자연히 핀치는 얼리비에이-리 부부와 가깝게 지냈는데, 그러다 보니 리와 핀치가 눈이 맞은 것이었다. 불륜의 시작은 이미 호주에서부터였고, 얼리비에이가 불륜에 대해 알게 된 건 런던에서였다. 얼리비에이는 핀치의 스승이자 고용주이기도 했으니 배신감은 이중으로 컸을 터. 그래도 얼리비에이는 핀치를 해고하지 않았다. 심지어 리와 핀치는 함께 호주로 떠나기 위해 런던 [[히스로 공항]]까지 갔는데, 비행기가 연착하는 사이 따라잡은 얼리비에이가 리를 설득해서 다시 런던 집으로 데려왔다. 이 사건을 모티브로 리의 친구 테런스 래티건[* Terence Rattigan. 1911 - 1977.]이 대본을 집필하기도 했다. 영화는 1963년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리처드 버튼]]이 주연을 맡아 <[[예기치 못한 일]]>이란 제목 하에 개봉돼 미국에서 엄청나게 흥행했다. 얼리비에이는 리가 갑자기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한 것이나 동시에 여러 사람들과 바람피우기 시작한 것이 이 문서에서 계속해서 언급되고 있으며 흔히 조울증이라고 불리는 [[양극성장애]]의 징후라는 걸 전혀 알지 못했다. 당시는 "bipolar disorder"라는 말조차 존재하지 않던 시대였다. 리는 전기 충격 요법까지 받으며 상태를 완화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없었다. 리는 양극성장애에서 유발된 성적 충동을 억제하기 힘들어했고 이는 자연히 육체적 외도의 연속으로 이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